남자들에 관한 두 가지 편견이 있었다. 그들은 떡볶이와 과자를 먹지 않으리라, 그리고 개인별 차이는 있으되 운동을 잘 할 것이다. 기록과 편견은 깨지기 위해 존재하는 것. 모든 남자들이 마이클 펠프스의 폐활량이나 마이크 타이슨의 힘을 지니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 건 헬스 클럽에서였다.
내 안의 분노를 가라앉히고 희망을 끌어올리는 혼자만의 축제. 나에게 운동은 그런 의미였다. 때문에 10개월 가까이 일주일에 10시간 남짓한 시간을 헬스 클럽에서 보내다 보니 그 안에 존재하는 한결같은 흐름이 자연스레 포착됐다. 여자들은 대부분 유산소 운동에 집중하고 남자들은 근력 운동에 매달린다는 것이었다. 트레드밀과 사이클링 기구가 모여 있는 유산소 운동실에는 근력 운동에 들어가기 전 워밍업중인 남자들과 간혹 땀복까지 껴입고 파워 워킹을 하는 여자들이 혼재한다. 텔레비전에 시선을 고정한 채 바삐 건각을 옮기는 사람들이 대형 에어컨 여러 대가 가동 중인 실내 온도를 한껏 끌어올리며 8월 염천은 아랑곳하지 않고 육수를 쏟아낸다. 근력 운동 기구들이 모인 웨이트 룸으로 가면 성비는 균형을 잃는다.
근육을 만들고 싶다면 하루 30분 이상의 유산소 운동은 자제하라는, 그리고 러닝은 주 3회로 제한하는 게 좋다는 트레이너의 충고를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어왔다. 그러나 난 트레드밀 위에만 올라서면 마치 그 위에서 죽음을 맞이하기로 작정한 사람처럼 걷고 뛴 연후에야 비로소 갖가지 인간 군상들에게 시선이 돌아간다. 몇 년 전부터 유연성과 근력을 키워준다며 새로이 등장한 짐볼. 어렸을 적 깔고 앉아 놀던 ‘탱탱볼’과 비슷한 짐볼을 들고, 누르고, 껴안는 이들은 대개 여자들이었다. 어느 날, 짐볼 위에 배를 깔고 누워 사지를 방치하고 있는 누군가를 보고도 으레 여자이려니 했던 건 그런 이유였다. 하지만 조선무 같은 토실한 다리와 그 위를 수북하게 감싼 체모, 푸짐한 등판, 항공 모함 같은 커다란 운동화를 보니 그는 나와 다른 탈의실을 쓰는 쪽이었다. 헬스 클럽의 진화, 더불어 인식의 진화까지 체감한 순간이었다. 예전엔 적어도 헬스 클럽을 다니는 남자라면 ‘똥폼’을 잡더라도 덤벨 벤치 프레스 앞이어야 했지만 바야흐로 작금은 동그란 짐볼 위에 건장한 남자가 긴장을 놓은 채 널브러져 누워 있어도 거리낄 게 없는 시대다.
헬스 클럽의 ‘그들’은 대략 세 부류로 나뉜다. 첫째, ‘죽어도 좋아’형. 보조자의 도움 없이는 들어올리기조차 힘든, 그저 보기에도 너무나 버거워 보이는 역기나 덤벨을 들며 웨이트 룸 전체가 울릴 만큼 ‘끙~끙~’ 신음을 뱉어낸다. 관자놀이엔 핏발이 서고 사지가 위태롭게 후들거리는데 19세 이상 관람가 영화에서 들리던 소리와 비슷한 사운드가 새어 나오는 것도 잊은 그들. 두 번째는 ‘꿈은 이루어질까?’형. 밋밋하고 특징 없거나 때론 풍만하기까지 한 몸매에 근육의 음양을 아로새기겠다는 각오로 기구 앞에 서지만 수줍어 보이는 게 그들의 특징이다. 세 번째는 ‘운동이 제일 쉬웠어요’형. 저러다가 케이블 끊어지는 거 아닐까 싶을 만큼 무자비하게 잡아당기고 무게추 최하단부에 키를 꽂는 그들. 모든 기구들을 능란하게 다루고 3D 엠보싱을 이룬 근육을 온몸으로 표출하는 부류들이다. 이따금 친구와 짝을 이루어 온 ‘꿈은 이루어질까? ’형이 혼자 온 ‘운동이 제일 쉬웠어요’형을 부러운 듯 훔쳐보는 걸 나는 다시 훔쳐본다.
어렸을 적부터 운동 신경 하나는 평균 이상이라는 혼자만의 자신감을 잃지 않았기에 근육에의 소망을 일장춘몽으로 끝내지 않으리라는 비장함으로 온갖 기구들과 씨름하던 어느 날, 나는 묘한 소외를 감지했다. 상황은 이랬다. 나는 트레이너가 짠 프로그램에 따라 이 기구에서 저 기구로 메뚜기처럼 옮겨 다니며 서킷 트레이닝을 하고 있었다. 운동과 운동 사이에 빈틈을 주지 않았고 간혹 자리만 차지하고 앉아 스포츠 중계를 보고 있는 남자들에겐 좀 비켜달라는 양해를 구하기도 했다. 그런데 내가 어떤 기계에 앉으면 옆에 있던 그들은 홀연히 떠나고, 들숨 날숨을 계산하며 무엇인가를 하고 있으면 내 주위는커녕 근처 기구에도 다가오지 않았다. 나도 알고 있다. 신은 나에게 모든 남자를 무릎 꿇게 한다는 안젤리나 졸리의 치명적인 유혹 인자 같은 건 애초부터 주지도 않았다는 것을. 백화점 판매대에서 산 3만 원짜리 긴 트레이닝 팬츠, 헬스 클럽 회원 전용 반팔 티셔츠 차림으로 시선 끌어 모으기엔 턱없이 모자란 복장이라는 것도 인정한다. 소심 모드로 돌변한 나, 잠깐 거울을 보니 고개가 숙여지고 마음이 숙연해졌다. 몇 번이나 세탁기의 거센 물살 속에서 몸살을 앓아 보풀이 일고 너덜해진 헤어 밴드에 컨실러 한 통을 쏟아부어도 가려지지 않을 다크 서클, 한여름의 햇살 속에 만개한 기미와 주근깨, 거기에 ‘순창 고추장’을 발라놓은 것 같은 빨간 립스틱은 비극적일 만큼 화룡점정이었다. ‘자고로 운동은 웃으며 못한다’는 평소의 생각을 그대로 드러낸 비장하고 엄숙한 표정은 그 자체로 반경 2미터 내 접근 금지와 동의어가 됐다. 하지만 진정한 원인은 다른 곳에 있었다.
자신의 근육이 움직이는 걸 보면서 운동하면 동작과 자세에 대한 이해가 빨라지기 때문에 대개 헬스 클럽 벽면에는 전신 거울이 부착돼 있다. 이는 트레이너들의 권장 사항이기도 하다. 무거운 덤벨을 들 때면 나도 모르게 변기 위에 앉은 일곱 살 짱구 같은 표정이 만들어지는 건 보고 싶지 않지만 자세를 수정하고 익히기 위해 거울을 보며 어깨 운동을 하고 있었다. 우연히 내 뒤편에 있는 남자를 보니 나와 같은 중량의 덤벨을 들고 같은 동작을 하고 있었다. 10파운드, 그러니까 4.5kg 정도의 덤벨이었다. 거울 속에서 눈이 마주치자 그는 등을 돌렸다. 아줌마의 예리한 촉수는 그가 덩치만 큰 ‘꿈은 이루어질까?’형이라는 사실을 금세 간파했다. 네 세트 - 12회를 1세트로 계산한다 - 까지 운동을 계속하자 그는 덤벨을 놓고 다른 기구로 옮겨 갔다.
고등학교 체력장 때부터 나만의 독무대라 할 만큼 발군의 실력을 발휘해 온 윗몸 일으키기. 과거의 입시형 윗몸 일으키기에서 탈피, 근육의 수축과 이완에 집중하며 복근에 긴장감을 더하는 요령을 배운 터라 그날도 기구의 각도를 30도쯤 세워 숫자를 세어가며 두 세트째에 접어들고 있었다. 나란히 기구에 누워 안색을 붉은 악마로 물들이며 윗몸 일으키기를 하던 남자의 몸엔 두 세대가 화합하고 있었다. 얼굴은 20대인데 복부는 40대였다. 그는 마무리 스트레칭도 하지 않고 떠났다. 능숙하지 못한 그의 실력을 비웃은 적도 없고 나처럼 해보라고 잘난 척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때로 육신은 마음을 전시하는 가장 큰 그릇이 되기도 하는 법이다. 나는 겨우 입술만 움직이며 ‘핫둘, 핫둘~’ 상체를 올렸다, 내렸다 했을 뿐이지만 솔직히 좀처럼 올라오지 않는 그 남자의 몸이 신기하기는 했다. 그가 내 마음을 읽었거나 옆에 앉은 작은 체구의 여자에게 실력의 우위를 점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달갑지 않은 모양이었다. 복근 강화 운동 중 팔꿈치와 등만 대고 복부를 긴장한 채 하체를 접어 올리는 기구가 있는데, 보는 순간 어렸을 적부터 매달려 놀았던 놀이터의 평행봉이 생각났다. 고맙게도 몸은 그때의 감각을 기억하고 있었고 해보니 의외로 쉬웠다. 하지만 이 기구엔 좀처럼 여자들이 접근하지 않는다는데 시선 집중의 원인이 있었다. 다람쥐처럼 날쌔게 몸을 놀리는 나를 거울 기둥 뒤에서 신기하게 바라보다가 내가 시야의 사정권에서 사라지자 그제서야 기구에 매달려 보는 남자도 있었다.
나는 마치 신성 불가침의 영역을 침범한 무뢰한이 된 기분이었다. 위의 반응으로 보자면 적어도 헬스 클럽 웨이트 룸에서의 나는 XY염색체 소유자가 절대적인 이곳에서 안색하나 변하지 않는 철면피와 남성성의 상징인 근육을 ‘감히’ 흉내 내려는 무모한 도전자, 그 사이에 위치하는 것 같았다. 트레이너들이 적극적으로 운동하는 날 보고는 이따금 목소리 높여 “힘 좋으신데요!”하고 칭찬까지 해주니 아마도 여자 헐크쯤으로 보였던 걸까? 어느 쪽이든, 그들의 편견에 반하는 불편한 존재인 듯하지만 어쩌나. 나는 전혀 개의치 않을 것이다.
6주에 한 번 하는 보디 체크를 해보니 이전에 비해 겨우 300g의 근육이 늘어나 있었다. 점진적으로 늘고 있지만 그래프는 여전히 둔각을 그리고 있다. 주위에선 내가 남자였다면 ‘그들’에게는 헬스 클럽으로 발걸음을 향하게 하는 모티브가 됐을 것이며, ‘그녀들’에겐 흥분제인 왕자 복근이 생겼을 뿐 아니라 심지어 그걸로 도장도 찍었을 거라며 입을 모은다. 하지만 비대해진 허벅지 근육 때문에 상대적으로 작아 보이는 둔부 사이를 위태롭게 파고드는 팬티 조각을 걸친 근육맨은 내가 가려는 길이 아니다. 덤벨 좀 든다고 강도를 때려 잡을 것도 아니고 맨손으로 트럭을 끌 것도 아니다. 그저 나는 밋밋했던 몸에 근육의 흔적이 돋아나는 게 척박했던 황무지에 새싹 돋아나는 것처럼 반가울 뿐이다.
글 | 노은아(프리랜서작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