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퍼스널트레이닝

행복한동행 - 거절의 기술

뉴로트레이너 강박사 2009. 12. 31. 09:47

 


유학을 가기로 하고 독일에 있는 각 대학에 지원서를 보내던 시절이었다. 한 달쯤 지났을까, 여기저기서 답장이 날아오기 시작했다. 그중에는 두툼한 봉투가 절반, 얇은 봉투가 절반쯤 됐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두꺼운 봉투들이 모두 불합격 통지서였단 사실이다. 입학을 허가할 수 없다고 통보해 온 대학들에서 보낸 봉투가 두툼했던 이유는 나와 그 대학이 잘 맞지 않기 때문일 뿐, 내가 실력이 부족해서 받아들일 수 없는 건 아니라는 친절한 배려까지 담느라 내용이 길어졌기 때문이다. 합격 통지서의 내용은 너무나 간단했다. 준비해야 할 서류들의 목록과 몇 월 며칠까지 비자 문제를 해결하고 독일로 입국하라는 내용이 전부였다.

문득 대학원 입학 시험을 보던 시절이 생각났다. 인천에 살았던 난 서울까지 가서 학교에 붙어 있는 게시판을 보고야 당락을 확인할 수 있었다. 불합격자에 대한 배려는 전혀 없었다. 이후에 베를린에서 몇 년간의 유학 생활을 하면서도 어디엔가 지원서를 제출할 때마다 두툼한 불합격 통지서를 받는 일은 여러 번 반복되었고, 난 언제부턴가 편지가 오면 봉투의 두께부터 만져 보는 버릇이 생겼다.

서울로 돌아와서 생활한 지도 벌써 5년이 다 되어 간다. 그 사이에 직업은 번역가 겸 북 에이전트, 칼럼니스트로 늘어났다. 그만큼 상대해야 하는 사람들, 하루에 주고 받아야 하는 메일이나 전화의 양도 늘었다. 일이 느는 만큼 사안의 경중에 따라 답변을 미루는 일도 본의 아니게 많아진다. 성사될 일이 아니다 싶으면 답장을 미루는 일도 늘어난다. 이러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한정된 시간에 해결할 수 있는 양은 정해져 있기 때문에 자꾸만 벌어지는 상황이다. 그럴 때마다 불합격 통지서를 받고도 전혀 기분이 나쁘지 않았던 그 시절을 떠올려 본다. 만일 그때 짤막한 불합격 통지서만 왔다면 내 기분은 어땠을까? 마음은 그렇게 과거를 떠올리고 양심의 가책을 느끼면서도 정작 손발은 우선 잘된 일부터 처리하고 있을 때가 대부분이다.

새해부터는 일하는 패턴을 바꾸기로 마음먹어 본다. 안 된 일부터 답장 보내기, 상세하게 그 이유를 설명해주기, 거절해야 하는 일일수록 빨리 결정해서 통보해주기로 말이다. 어쩌면 그게 미래를 위한 더 탄탄한 투자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동준 님 | 번역가·북세븐틴에이전시 대표

-《행복한동행》2010년 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