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퇴근 시간이 규칙적인 직장인 자리를 박차고 나와, 프리랜서의 길에서 디딘 첫걸음은 방송국 구성 작가였다. 뭐든 하고 싶은 건 해 봐야 직성이 풀리는 나로서는, 멋모르고 시작한 일이었다. 출퇴근이 따로 없다지만 24시간 업무 중이고, 직장에서 위아래 쌍방으로 받는 스트레스를 벗어났다 안심했지만 더 많은 사람들과 교류하면서 생기는 긴장과 불안은 위장병과 과민성대장증상 등 각종 후유증을 몰고 올 정도였다. 게다가 자정을 넘겨 새벽이 되어도 방송국에서 새우잠을 자며 쪽 대본을 쓰거나 편집 테이프를 기다리는 일이 왕왕 있었다.
그렇게 초보 구성 작가 티를 팍팍 내며 지내던 어느 날이다. 새벽녘 복도 끝 화장실에 막 들어섰을 때, 어디선가 나지막이 들리는 곡소리에 갑자기 등골이 서늘해졌다. 오가는 사람 없는 새벽인지라 텅 빈 복도에서 울리는 내 발자국 울림만으로도 오싹할 판에, 흐느끼는 여자의 울음소리라니! 막 뛰어나가자니 그게 더 겁나, 발끝으로 살살 걸어 들어갔다. 굳게 잠긴 가운데 칸에서 새어나오는 소리가 틀림없었다. 대체 누굴까. 이 시간에 여기서 저리 구슬프게 울고 있는 이유가 뭘까. 오만가지 생각이 들 때 갑자기 안쪽에서 문이 벌컥 열렸다. 다른 프로그램을 맡아 하던 선배 작가였다. 참으로 무안할 그 순간에 그녀가 퉁퉁 부은 눈으로 씩 웃으며 내게 먼저 던진 말.“ 너도 한판 하러 왔니?”그러곤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나갔다'. 이거 참, 무안하구만.'속으로 중얼거리던 나는 나중에서야 그 이유를 알았다.
방송국에서의 화장실은, 단순히 볼일을 보는 장소일 뿐 아니라 구성작가들의 희로애락이 오가는 곳이라는 사실을. 속상하고 치받는 일이 있을 때마다 그렇게 화장실로 뛰어들어가 실컷 울고 나와 다시 마음 다잡고 말짱한 척 독하게 일을 한다는 것을 말이 다. 왜 아니겠는가. 나 역시 그날 이후 부지기수로 달려가 울분을 토하고 화를 삭이는 장소로 화장실을 애용하기 시작했고, 어느 땐가 그곳에서 도를 닦는 경지에 이르렀다. 나아가 선배 작가, 동료 작가, 후배 작가들의 어깨를 토닥이며 서로의 마음을 위로하는 곳도 그곳이었으니, 구성 작가들에게 있어 화장실은 참 애달프고 애틋한 장소가 아닐 수 없다. 그래서 구성 작가들은 농담 삼아 이렇게 말하곤 한다.“ 냄새 나는 화장실에서 서럽게 울어 봤어? 안 울어봤으면 말을 하지 마세요!”
정윤희 님 | 방송 작가·디지털 칼럼니스트
출처 : 인터넷 좋은생각 사람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