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집 이웃에 늦장가 들어 아들 하나를 낳고 사는 동네 형이 있다. 젊은 사람들이 부모에게 물려받은 터를 지키며 사는 것도 대견한데, 아이까지 까불거리며 동네를 내달으니 어른들이 너나없이 이들 가족을 자손처럼 위하고 아꼈다.
실상 형은 동네 사람들에게 자식이나 다름없기도 했다. 일찍이 부모를 여의어 그는 십대 때 이미 셋이나 되는 동생들을 뒷바라지하는 가장이었다. 동네에서 알게 모르게 돌보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사정이 그 정도면 주눅 들어 살았을 법한데도 그는 워낙 너름새 있고 활달했다. 어른이라면 무람없이 아재, 어매 해가며 따랐고, 아무 집 밥상머리나 가족마냥 끼여 앉았다. 발 냄새가 심해서 할머니가 면박을 주곤 하였는데 발길을 끊는 대신 발바닥에 안티푸라민을 처바르고 와서 할머니에게 맡아 보시라고 발을 내밀고는 하였다.
어려서는 짓궂어서 나 같은 조무래기들을 곧잘 골려 먹었다. 그가 유리구슬에 박힌 무늬가 하늘에 뜬 구름을 떼다가 넣은 거라고 해서 나는 한동안 철석같이 믿었다. 지금 돌이켜 보면 유리구슬을 깨뜨려 볼 생각을 그때는 왜 한 번도 못했는지 모르겠다. 그뿐이 아니다.
“야야, 고무신에다가 요소 비료를 넣고 댕기믄 키가 쑥쑥 큰다더라. 양키들은 그러고 다닌대.”
그래서 동네 아이들이 실제로 실험해 보고는 하였다.
그런 형이 한때 제 아들 탓에 골머리를 앓았다고 한다. 아들이 네 살 날 무렵이었다. 밤이면 아이가 늦게까지 자지 않고 텔레비전에 빠져 지냈다. 이제 겨우 말문이 터진 아이가 드라마 보고, 광고에 손뼉 치고, 애국가까지 웅얼웅얼 따라 부른 다음 이부자리로 기어든다는 거였다. 텔레비전을 켜고 끄는 것도 제 스스로 했다. 천재라는 소리가 아니었다. 그저 텔레비전이 번쩍이고 시끄러운 게 제 딴에는 신기하고 좋은 눈치였다. 형 내외는 몸이 고되어 초저녁잠에 빠지기 일쑤였는데 눈을 떠 보면 아이가 그러고 있으니 놀라 숨넘어갈 지경이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형은 예의 너스레를 떨었다.
“지 동생 하나 맹글어 주고 자퍼도 그럴 틈을 안 준다니께. 저런 요상한 놈이 으디서 나왔으까.”
이들 부부의 고민이 조그만 동네의 어른들 귀에도 들어간 모양이었다. 그 얘기를 전해 듣고 노인들은 걱정은커녕 박장대소를 했다.
“씨도둑질은 못 헌다더니만 부전자전이구만.”
그 형이 제 아들만 했을 때 이야기이다. 부모가 정을 나누다가 윗목 기척이 이상해서 고개를 돌려보면 아들이 어둠 속에 팔짱을 끼고 앉아서 “싸가지 없는 것들이……” 하고 흘겨보더라는 것이다. 이제는 비밀도 아닌 우스갯소리로 어른들은 형을 놀려댔다.
“그것이 다 내력이 있는 짓이여.”
형은 겸연쩍어서 머리를 긁적였다고 한다.
나는 형의 사연을 전해 듣고 웃음도 웃음이지만, 시골 공동체가 아니라면 이제 어디서 이런 비밀스런 증언을 접할 수 있을까 생각했다. 시골은 또한 그런 곳이다.
작가소개
이야기 들려주는 남자, 전성태 님
1969년 전남 고흥에서 태어나 중앙대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고, 1994년 실천문학신인상을 받으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늑대>, <매향(埋香)>, <국경을 넘는 일>과 장편소설 <여자 이발사>가 있으며, 신동엽창작상을 수상했다.
출처 : 인터넷 좋은생각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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