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단하시네요
대한민국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한 천재공무원
김재익.
전두환 정권 시절 청와대 경제 수석이었던 분으로,
일반 대중들에겐 1983년 10월 9일 아웅산 테러로 사망한 고위 공무원 정도로만 알려져 있다.
45세의 젊은 나이에 숨지지 않았다면
김재익은 대한민국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을 것이란
평가가 지배적일 정도로 김재익이 80년대 한국의 경제 발전에 끼친 공로는 지대하다. 일단 뭣 때매 이 난리인지 시대 상황을 대충이나마 살펴보자.
"김일성 밑에 가서도 일할 놈"
박정희 대통령의 집권 말기의 한국의 경제 상황은 말 그대로
작두날 위에선 무당마냥 조마조마했다고나 할까. 성장에 목숨 걸었던 한국 경제는 18년간 고질적인 경기 과열과 인플레이션에 몸살을 앓고 있었는데 거기에 오일 쇼크까지 겹쳐 아주 환장을 할 지경이었다.
게다가 수없이 많은 저소득 노동자들은 말할 수 없이 비참한 근로 환경에서 일을 해야 했으며, 이런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권력층은 썩을대로 썩어 누가누가 더 많이 해먹나 부패 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이러면 안되겠다 싶어 당시 경제기획원에서는 시장을 개방하고 성장보다는 안정화 시책을 쓰자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대기업과 부패 공무원들을 등에 엎은 박정희 대통령은 이를 뚝딱 뒤집어 엎으시고 다시 대기업 위주의 성장 정책으로 회귀하시려다 총격에 숨을 거뒀다.
이런 상황에서 정권을 잡은 전두환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뭔가 문제가 많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뭐부터 해야 할지 알수가 없었다. 누군가 경제를 잘 아는 사람에게 맡기고 싶었을 뿐.
이때 등장한 인물이 바로 김재익이었다.
당시 경제 기획원에서 근무하다가 보따리 싸고 학교로 돌아가려고 했던 김재익을 전두환이 불렀던 것.
당시 지식인들에게 전두환은 하극상에
사람을 죽이고 정권을 잡은 백정같은 인물에 불과했다.
그런데 그런 백정 밑으로 기어들어가다니.
당시 대학생이었던 아들이 애비에게 극렬 항의했다.
이에 김재익은 이렇게 타일렀다.
"경제의 개방화와 국제화는 결국 독재체제를 어렵게 하고
시장경제가 자리잡으면 정치의 민주화는 자연히 따라온다."
김재익의 아내는 주변 사람들에게
"김재익은 김일성 밑에 가서도 일할 놈"이란 말까지 들었다고 한다.
김재익은 이 말을 전해듣자 이렇게 답했다.
"만약에 내가 김일성을 설득시켜 그 사람의 생각을 바꾸어 놓을 수 있다는 확신이 있으면 해야지."
김재익은 자신을 청와대 경제수석으로 임명하려는 전두환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제가 생각하는 경제 정책은 인기도 없고 기존의 세력들이 환영하지도 않습니다. 그래도 저를 쓰겠습니까?"
그러자 전두환이 했던 유명한 말.
"경제는 당신이 대통령이야."
실제로 그랬다.
김재익은 그 이후로 3년간 대한민국의 경제를 좌지우지한
경제 대통령이 되었다. 이는 전두환에게는 물론, 대한민국에 엄청난 행운이었다.
성장 지상주의 마약에서 벗어나다
김재익은 제일 먼저 인플레이션 잡아야 했다.
그러기 위해선 개방화가 필수적이었다. 인위적인 가격 안정책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값싸고 질 좋은 외국 제품을 다량 들여 와야 근본적인 물가를 안정시킬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이제는) 수출보다는 수입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20년간 수출 지상주의에 목매던 박정희 시대 경제 정책을 180도 뒤바꾼 것이다.
지난 20년간 투기업자, 대기업들을 위한 성장 위주의 보호 정책이 서민들을 위한 개방 정책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김재익은 임기 동안 과감한 수입 자유화 정책 시행했고
지속적인 긴축 정책 실시, 전두환 정권 내내 안정적인 물가를 유지했다.
"전두환이 다른 건 몰라도 물가는 확실히 잡았다"는 말이 있는데, 전두환이 아니라 김재익이 잡은 거다.
김재익은 철저한 자본주의자에 자유시장경제 체제 옹호자였다.
그에겐 서민들을 위한 물가 안정도 중요했지만
그보다는 수입 자유화를 통해 한국 기업이 외국 기업들과 경쟁하고,
장기적으로 막강한 자생력과 경쟁력을 가지게 만드는 것이 더 중요했다.
"우리는 앙심을 먹고 돈을 안 풀기로 했다... 우리는 이제 개방화로 간다. 물론 초기 단계는 무역 자유화이고, 다음은 자본 자유화다." - 김재익
수출 지상주의와 함께 박정희 시대를 지배했던 또 하나의 이념은
"대기업 중심의 고도 성장"이었다. 김재익은 이런 성장 지상주의의 경제 개념을 뒤바꾸어 버렸다.
그는 대기업을 위한 차별 금융제도, 세제혜택 철폐를 주장했다
. 대기업의 독과점을 막기 위한 공정거래제도 채택까지 주장했다.
그리곤 중소기업 진흥 재단 집중 지원했으며, 벤처 기업 육성 강조했다.
"이제는 20대 재벌기업을 지원하는 정책을 앙심 먹고 철수하려 한다. 그 1500배에 달하는 3만여 개의 중소기업이 뛰놀 마당을 만들어야 한다" - 김재익
미래를 내다 본 공무원
80년대 당시 청와대 출입 기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김재익은 참으로 신비로운 사람이었다.
그는 1980년에 이미 20년 뒤에나 가능할 지하철과 버스를 연계하는
대중 교통 시스템과, 전자 통신 기술로 발생할 정보 산업 혁명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냥 이야기에 그친 것이 아니라, 그는 실제로 국가발전의 원동력을 IT로 삼았다.
그는 1980년 전자/정보 통신 산업이 5년 안에 2배 성장하고
한국의 차세대 제1 산업으로 발돋움 할 것이라 주장했다.
그는 이미 70년대 후반 경제 기획원에 있을 때부터 전화기의 자급제를 실시를 주도했다. 기계식 전화기에서 전자식 전화기로 전환토록 한 것도 김재익의 노력이었으며, 세계 최고 수준의 전화 네트웍을 전국에 구축케 한 것도 김재익의 노력이었다. 이후 컬러TV 송수신을 자유화한 것도 김재익이 주도한 일. 김재익은 오명과 홍성원 공학박사를 정보통신 산업담당 경제비서관으로 임명하고
정보통신 산업 개발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이렇게 김재익이 구축한 정보통신 산업 개발을 위한 시스템은
그가 죽은 후에도 계속 이어져 김대중 시대에 와서 그 위력을 실감하게 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부르짖은 동북아 경제 허브論 역시 원래는 김재익이 구상한 것이다.
김재익이 구상한 것은 싱가폴이 모델이었다.
싱가폴처럼 한국은 동북 아시아의 금융 센터로 발돋움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김재익은 실제로 외국 금융 자본 유치에 결정적 기여했으며, 한미은행과 신한은행의 탄생을 가져온다.
김재익은 외채, 외국 자본의 도입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외채에 대해서는 대학생들의 거부 반응이 있다.
경제 종속으로 망국의 위기를 부른다는 논리다. 이건 잘못된 판단이다.
한세기 전 영국의 발전과 비교하여 절망적이라던 독일이 일어난 것은 바로 해외자본 투자 때문이다..."
"하나의 모델이 있다면 그건 스웨덴이다.
인구 8백만의 이 북유럽 복지국가는 오랫동안 1인당 GNP 최상위 국가에 있다.
해외 자본 투자 덕이다. 이 나라에서 가장 수익을 많이 올리고 있는 회사는 바로 IBM이다.
이 회사를 통해 수십 명의 최고급 기술자가 배출된다. 세금도 제일 많이 낸다."
자본주의자 김재익
김재익이 가장 싫어했던 건 온정주의적인 반자본주의 정책이었다.
그 중의 하나가 이중 곡가제였다. 추곡 수매라고도 하는 이 이상한 제도는
농부들에게 쌀을 비싸게 사서 시장엔 싸게 내놓는 건데 이 때문에 정부의 재정은 피폐해지고, 농부들은 무작정 쌀만 키우고, 그것도 질보다 양으로 승부하고, 그러다 보니 쌀값이 폭락해 모두가 공멸하는 참 공산주의스러운 정책이었다.
김재익은 이중 곡가제와 같은 농촌 보조 정책이 정부의 재정 적자를 심화시킬 뿐 아니라,
결국 농촌을 망하게 한다고, 어서 빨리 철폐하고 농촌의 자생력을 위해 투자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근데 아무도 안했다. 여전히 한국의 농촌은 수입의 70%를 정부 보조금으로 의존해 사는 식물인간 조직이다.
태반의